나는 고려 사람이다
김준
나는 로씨야 원동
이만강변 고려사람이다
백두산 신령이 먹이지 못해
멀리 강건너로 쫓아낸
할아버지의 손자로다.
로씨야의 “마마”보다도
카사흐의 “아빠”보다도
그루시야의 “나나”보다도
고려의 “어머니”란 말이
내 정신엔 뿌리 더 깊다.
(* 고려인 1세대 작가 김준(1900-1979)의 시 「나는 조선사람이다」 중에서. ‘고려’의 원문은 ‘조선’임)
김준(1900-1979)은 고려인을 대표하는 시인이자 소설가다. 1950년대부터 중편소설 「지홍련」, 장편서사시 「마흔여덟 사람」 등 다수의 작품을 발표하였다.
1964년에 고려인 최초로 장편소설집 『십오만원사건』을, 1977년에는 개인시집 『그대와 말하노라』(1977)를 발간했고, 1985년에는 유고시집 『숨』(1985)이 편찬되었다.
I. 이주와 정착 (1863 - )
기근과 자연재해를 피해 연해주로!
고려인의 역사는 기근에 시달리던 함경도 주민 13가구가 두만강을 건너 러시아 연해주 지신허 강변으로 들어가 농사를 짓고 살아간 1863년부터 시작된다. 국경지방 조선인들은 잦은 자연재해로 생계가 어려워지자 이를 피해 연이어 두만강을 건넜다. 연해주 고려인 인구는 1882년에 10,137명, 1904년 들어 고려인 정착지가 32개 마을로 늘면서 1906년에는 3만 4,399명, 1912년에는 5만 9,715명으로 증가했다. 통계에 잡히지 않은 30%의 비공식 인구까지 포함하면 1910년 무렵의 고려인 수는 8만-10만 명에 이르렀을 것으로 보인다. 블라디보스토크에는 1873년부터 고려인이 거주하기 시작했다.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은 1920년까지 고려인의 문화와 항일운동의 근거지가 되었다.
사진-1: 러시아 황실에서 편찬한 『다채로운 러시아』(1895년)에 실린 고려인 초기 이주민들의 모습. 이 책에는 당시 고려인들의 생활상이 박물학적으로 기록되어 있다.
사진-2: 연해주 초기 이주민 정선달의 가족. 정선달은 일찍이 연해주로 이주하여 집안을 일으키고 러시아정교회 신부로 활동했다. 이 사진은 그가 이주한 뒤 생활의 안정을 되찾고 오랜 시일이 지나서 찍은 것이다. (1922년 무렵)
사진-3: 항일독립운동가 김 아파나시와 고려인 사회운동지도자들. 2열 좌측 2번째가 선봉신문 농업부장 황동훈, 4번째가 고려인 자치주 획득을 위해 노력한 한명세, 6번째 안경 쓴 이가 김 아파나시다. 그 외 남준표, 채 그리고리 등의 모습도 보인다. (1923-1925년)
사진-4: 최재형(1860-1920)은 고려인사회의 단합, 교육과 계몽, 언론, 독립운동, 의병활동 등 모든 부분에서 고려인사회를 이끈 탁월한 지도자다.
그는 을사늑약(1905년)으로 조국이 위급해지자 평생을 국권회복과 민족을 위해 헌신하였다. 1920년 4월 4-5일 일본군이 연해주지역 여러 고려인 항일운동 단체와 개인을 무차별 공격해 살상하는 만행을 저질렀을 때(4월참변) 그들에게 체포되어 총살당했다.
II. 항일운동 (1905 - 1922)
원동과 시베리아에 울려 퍼진 대한독립만세! (1919년 3월 17-18일)
연해주로 넘어간 애국지사와 지식인들은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과 우수리스크에 집중적으로 모여들어 이 지역은 고려인 항일애국운동의 중심지 역할을 하였다. 한반도에서 3.1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났다는 소식이 들려오자 연해주 고려인들은 크게 고무되어 1919년 3월 17-18일 블라디보스토크와 우수리스크에서 최초의 대한민국임시정부인 대한국민의회의 명의로 독립선언서를 낭독했다. 선언서는 조국독립을 염원하는 고려인들의 뜻을 세계만방에 알리고자 한국어, 러시아어, 영어, 중국어 4개 언어로 작성하여 우수리스크에서 인쇄하여 블라디보스토크로 가져가 배포하였다. 군중들은 태극기를 들고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신한촌에서 시내로 행진하였다. 만세운동물결은 이후 스빠스크, 하바롭스크, 블라고베셴스크, 이루쿠츠크, 옴스크, 모스크바 등 연해주 일대와 시베리아로 널리 퍼져나갔다.
사진-1: 우수리스크시에 있는 고려독립선언기념문. 3.1독립만세운동 제4주년을 기념하여 고려인들이 우수리스크에 세운 삼일운동기념문이다.
태극기와 ‘삼일독립운동데사회긔렴’이라고 쓰인 문구가 선명하다. 우수리스크는 블라디보스토크와 함께 고려인 항일운동의 주요 근거지였지만 그동안 이를 증명해줄 사진이 발견되지 않아 잘 조명되지 못한 측면이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사진이 갖는 의미는 매우 크다고 볼 수 있다. (1923년 3월 1일)
항일무장투쟁 본거지- 연해주
최재형, 안중근, 이동휘, 홍범도, 김 알렉산드라, 김경천, 이상설, 이위종 등 연해주에 활동
항일의병운동의 영웅 홍범도(1868-1943)장군
홍범도는 천민출신으로 의병장이 되어 타고난 게릴라전술을 구사하여 일본군의 간담을 서늘케 한 명장이다. 홍범도는 1894년부터 항일무장투쟁의 길에 들어섰고 1907년 11월부터 1908년 9월까지 연해주를 넘나들며 40여 차례의 크고 작은 전투를 치렀다. 1920년 6월에는 봉오동에서 일본군을 크게 무찔렀고(봉오동전투), 같은 해 10월에는 대한독립군단을 이끌고 김좌진의 북로군정서군을 도와 일본 정규군 1개 대대병력을 섬멸하는(청산리 대첩) 혁혁한 전과를 올렸다. 1937년에 연해주의 모든 고려인과 함께 강제이주를 당했고 이후 카자흐스탄 크즐오르다에서 고려극장의 수위장으로 일하다가 1943년에 사망했다.
사진-1: 홍범도와 새 아내 이인복과 그녀의 아이. 홍범도는 본처와 자식들이 모두 일경과 일본군에게 죽음을 당해 오랫동안 혼자 살아왔었다. (1929년 연해주 한까호수 부근)
사진-2: 홍범도의 일대기와 흉상건립 내력을 다룬 신문기사 (레닌기치 1984년 11월 21일)
항일무장투쟁의 별 김경천(1888-1942)장군과 「경천아일록」
김경천은 1920년대 노령 연해주에서 영웅적으로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한 전설적인 항일의병장이다. 그는 3.1운동 직후 일제에 빼앗긴 조국을 되찾겠다는 일념으로 연해주로 망명하여 조국과 민족을 위해 일관된 헌신과 희생의 삶을 살았다. 1919-1922년에 마적과 일본군 및 러시아 백군과 싸워 혁혁한 전과를 올렸으며 이를 바탕으로 전설적인 김장군으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1936년 소련 정부로부터 근거 없이 탄압받아 체포되었고 러시아 북부 꼬미자치공화국 수용소에서 복역하다가 1942년 1월에 사망하였다. 1956년과 1959년에 소련 군사재판소에서 재심되어 무죄를 선고받았다.
사진-1: 김경천과 아내 유정화. 이 사진은 김경천이 오랜만에 환국하여 유정화와 혼인을 치르고 다시 일본으로 돌아가 1~2년이 지난 1915년 봄에 찍은 것으로 보인다.
사진-2: 일기 「경천아일록(1919-1925)」에는 자신의 생애와 망명과정, 항일무장투쟁 전개과정, 전우와 부하에 대한 사랑, 서울에 두고 온 가족에 대한 그리움 등이 절절히 기록되어 있다.
펜 대신 칼을 들고, 삽자루 대신 총을 잡고! (1918-1922년)
3.1운동 당시 연해주에는 일본이 깊숙이 개입한 시베리아 내전이 진행되고 있었다. 고려인들은 조국을 빼앗은 일본침략자와 싸우기 위해 곳곳에서 러시아 적군과 연합하여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하였다. 젊은이들은 원동을 지키고 한반도 조국의 독립을 이루고자 홍범도, 김경천, 한창걸 같은 뛰어난 지휘관들의 지휘 아래 교사와 학생들은 펜 대신 칼을, 농민과 노동자 청년들은 삽자루 대신 총을 잡았다. 고려인들은 마을마다 빨치산부대협력위원회를 만들어 의연금을 모금하고 의복과 식량을 제공하고 부상자들을 치료해주었다. 시베리아 내전 기간에 1만 명 이상의 고려인이 46개의 독립군부대에 들어가 항일전투에 참가했고 민간인까지 포함하여 2천 명 이상이 사망했다.
III. 문화운동 (1923 - 1937)
항일무장투쟁에서 문화운동으로 (1923-1937년)
1922년 10월 25일 연해주에서 일본군이 철병하자 러시아는 고려인 빨치산부대를 서둘러 무장해제 시켰다. 러시아 측은 원동 주권을 지키고 일본군을 몰아내기 위해 피와 목숨을 바쳐가며 싸웠던 고려인들의 희생을 잊어버린 것은 아니었지만 일본과의 관계를 고려해 무장해제에 단호한 입장을 취했다. 1925년에는 소비에트 러시아가 일본과 정식으로 외교 관계를 수립하면서 고려인 항일운동을 완전히 금지시켰다. 다행히 소련은 문화적 항일표현을 억압하지는 않았다. 그리하여 고려인의 항일투쟁 역량은 자연스럽게 문화 계몽운동으로 전환되었다. 한반도에서 넘어간 다수의 인텔리와 애국지사들은 새로 건설된 집단농장의 농민학교에 들어가 청소년들에게 들끓는 애국사상을 심어주었다. 연해주 전역에 민족문화 부흥 운동이 활발히 일어나 1923년에 모국어 신문 《선봉》이, 1931년에 한민족 최초의 민족대학인 《고려사범대학교》가, 1932년에는 한민족 최초의 우리말 전문연극극장인 《고려극장》이 블라디보스토크에 설립되었다.
사진-1: 저항시 ‘짓밟힌 고려!’와 고려인한글문학의 시조 조명희(1894-1938).
조명희가 쓴 저항시 ‘짓밟힌 고려’는 연해주 일대 모든 고려인의 심금을 울렸다. 이 시는 발표되자마자 고려인사회에 널리 퍼져나가 학생은 물론이고 청장년 지식이라면 누구나 이 시를 외우는 것을 당연하게 여겼다.
시 ‘짓밟힌 고려’는 조국독립을 열망하는 고려인의 의지를 가장 잘 드러낸 상징으로 자리 잡았다.
1970-80년대까지도 중장년 고려인들은 이 시를 널리 낭송하곤 했다.
IV. 강제이주와 시련의 극복 (1937 - 1953)
강제이주와 민족문화의 시련 (1937)
1937년 8월 21일 스탈린은 고려인강제이주명령서에 서명했다. 이주는 9월 9일부터 시작되었고, 연해주, 아무르주, 자바이칼주에 살던 17만 명의 고려인이 모조리 강제이주 열차에 실려 중앙아시아로 끌려갔다.
강제이주는 고려인의 모든 것을 앗아가 버렸다. 그들은 피땀 흘려 일구어놓은 집과 토지를 잃었고 이주 과정에서 가족과 친척을 잃었으며 하루아침에 타민족들로부터 믿음을 잃었다.
강제이주 두어 해 전부터 민족운동의 지도자와 명망가, 지식인 2500여 명은 아무런 죄도 없이 체포되어 대부분이 처형되었다. 이주 첫해에 추위와 풍토병으로 1만 5천여 명의 어린이와 노약자들이 죽어 나갔다. 강제이주는 해외 한민족역사상 가장 큰 비극이었다.
사진-1: 재소고려인 한글문학평론가 정상진의 신문 기고문 「내가 직접 겪은 강제이주」(고려일보 2007년 8월 24일)
사진-2: 보이찌크(Войцик)교수와 5명의 이방인 (1937)
강제이주의 절망 속에서 눈물겨운 휴먼드라마도 생겨났다. 블라디보스토크 《고려사범대학교》 타민족교원 5명은 아끼던 제자들을 차마 버려둘 수 없어 자발적으로 강제이주 열차를 타고 고려인 학생들과 함께 중앙아시아로 들어갔던 것이다.
1937년 9월 10일 《고려사범대학교》 시당위원회는 사범대학교 학생총회를 개최하고 고려인이 곧 강제이주 된다는 사실과 사범대학교 학생들은 25일에 이주 열차를 타게 된다는 것을 처음으로 통보했다.
이 이야기를 들은 몇 명의 다른 민족 교원들은 얼마 후 따로 모여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리고 그들은 학생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너희들은 우리의 제자다.
우리는 제자들을 버려둘 수 없다. 우리는 너희와 함께 가겠다.” 그렇게 따라나선 이들은 사범대학장(유대인), 러시아어문학박사로 세계문학 및 문학원론을 강의했던 보이찌크 교수, 보이찌크의 아내인 러시아어 교수, 수학교수, 그리고 또 한 명의 교수였다.
또 학교 식당에서 일하던 러시아 처녀가 있었는데 그녀도 울면서 “나에게 가장 좋은 인상을 준 백성은 고려인이다. 나도 당신들과 함께 가겠다.”고 나섰다.
그들은 가족과 지인들의 간곡한 만류도 뿌리치고 고려인 학생들과 함께 강제이주 열차를 타고 카자흐스탄 크즐오르다로 들어갔다. 그리고 끝까지 고려인과 함께 살았다.
소비에트화의 비바람 속에서도 귿건히 지켜온 전통문화
전통음식, 돌, 혼인예식, 환갑잔치 등…
고려인들은 고유의 전통과 생활문화를 소중히 지켜왔다. 물론 이들은 한반도와 멀리 떨어진 곳에서 소통이 단절된 상태로 오랫동안 살아왔기 때문에, 그들이 지켜온 것들의 일부는 불가피하게 굴곡과 변화를 겪기도 했다. 하지만 음식과 통과의례 같은 뿌리 깊은 전통은 강력한 소비에트화의 비바람 속에서도 원형이 거의 손상되지 않은 채 고스란히 전해지고 있다. 중앙아시아 고려인사회에서는 지금도 대부분 전통음식이 옛것 그대로 만들어지고 있으며, 돌잡이 의식과 환갑잔치와 혼인예식 같은 통과의례도 전통의 형식과 내용이 거의 변형되지 않은 채 이어져 오고 있다.
사진-1: 돌상에 놓인 물건 중에서 실을 잡은 아기와 이를 지켜보는 할머니. 이 아기는 앞으로 오랫동안 살 것이다. (1988년 카자흐스탄)
사진-2: 집에서 혼인예식을 치르는 신랑과 신부(1951년 11월 25일 중앙아시아)
사진-3: 리 니끼타와 김 알렉산드라의 혼인예식. 상 위에 잘 장식된 삶은 닭이 놓여 있다. (1946년 2월 17일 만기크시)
사진-4: 강태훈 노인의 환갑잔치 (1956년 우즈베키스탄 사마르칸트시)
V. 황무지에서 피워낸 민족혼 (1938 - )
황무지를 옥토로 일군 민초와 노력영웅들 (1938 - )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 된 고려인들이 마주한 땅은 온통 진펄과 갈밭과 소금밭뿐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이에 굴하지 않고 이듬해 봄부터 갈대를 베고 땅을 고르고 수로를 내어 메마른 땅에 물을 대고 볍씨를 뿌렸다.
어느 민족보다 농경에 우수했던 고려인들은 농사에 극히 비우호적인 중앙아시아의 황무지를 푸른 옥토로 변모시켜나갔다.
고려인 집단농장 지도자와 일반조합원들의 헌신적인 노고로 강제이주 된 지 몇 년 지나지 않아 고려인들의 경제생활은 눈에 띄게 향상되었다.
경제기반이 잘 갖춰진 고려인 집단농장들은 민족지도자와 문화예술인들이 생계 걱정을 덜고 민족문화 부흥 운동에 더 열성적으로 뛰어들 수 있도록 다양한 물질적 토대도 마련해주었다.
사진-1: 모스크바에서 열린 평화옹호자 제2차 전연맹 컨퍼런스에 카자흐공화국의 소연방 가입 30주년을 기념하여 카자흐공화국 대표 중 한 명으로 초청받아 참석한 김만삼이 13명의 대표들과 함께 촬영한 사진. 가운데 회색 양복을 입은 이가 김만삼이다. (1950년 10월 16일)
게토에서 지켜낸 모국어와 한글문학 (1937 - 현재)
소련 정부는 1938년부터 고려인들에게 모국어 고등교육을 금지시켰다. 이에 따라 강제이주 이듬해 재개교된 《고려사범대학교》의 모든 강의가 러시아어로 진행되어 민족대학의 기능은 한순간에 사라지고 말았다. 다행히 강제이주 때 폐간된 모국어 신문사는 이듬해 《레닌기치》로 재창간되었고, 연해주에서 설립된 우리말극장인 《고려극장》도 본연의 활동을 이어가는데 큰 제약을 받지 않아 민족문화의 명맥은 끊기지 않았다.
모국어와 한글문학의 계승자 《고려일보》 (1938 – 현재)
원동 고려인들의 사랑을 받은 《선봉》 신문은 강제이주로 인해 폐간되었다가 이듬해인 1938년 5월 15일 카자흐스탄 크즐오르다주에서 《레닌기치》라는 이름으로 복간되었다. 《레닌기치》는 강제이주 된 고려인들의 유일한 모국어신문으로 고립된 중아아시아에서 모국어를 보존하고 발전시키는데 획기적인 역할을 담당하였다. 이 신문은 모국어문학의 발전에 크게 주목하고 다양한 모국어 작가들을 발굴하였으며 그들이 활동할 수 있는 지면을 폭넓게 제공하였다. 1991년에 《레닌기치》는 제호를 《고려일보》로 변경했다. 그런데 바로 그해 겨울에 소련이 붕괴되어 《고려일보》는 수많은 시련을 겪어야 했다. 하지만 헌신적인 몇몇 인물들에 의해 모국어 신문의 기능을 잃지 않고 지금까지 발행되고 있으며 고려인 모국어 기관의 상징으로 우뚝 서 있다.
모국어 문화의 전파자 《고려극장》 (1937 – 현재)
1932년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창단된 《고려극장》은 강제이주로 인해 극심한 굴곡과 단절을 겪은 다른 모국어 문화기관들과 달리 이주 직후에도 곧바로 본연의 활동을 이어나가는 행운을 누렸다. 그때 극장은 여러 고려인 집성촌을 찾아다니며 피폐해진 동족들의 마음을 걸출한 입담과 흥겨운 가무로 달래고 위로해주었으며, 동시에 강제이주의 와중에 가족과 흩어진 사람들의 생사를 확인하고 소식을 전달해주는 메신저 역할까지 감당했다. 1950년대 후반 들어 고려인에 대한 탄압이 누그러지자 《고려극장》은 이후 20여 년간 전무후무한 전성기를 구가하였다. 지금도 고려인문화를 대표하는 기관으로 자리 잡았다.
사진-1: 재소고려인 한글신문 《레닌기치》사 사원들. 가운데 앉은 이가 주필 남해룡이다. (1950년대 초반)
사진-2: 《고려극장》 창립 50주년을 맞아 모스크바에서 공연된 연극 「산부처」(한진 작)에서 열연하는 김 블라디미르(왕건 역), 박춘섭(원회 역), 박 마이야(황후 강씨 역) 배우 (1982년 모스크바)
VI. 광주의 고려인들 (2000 - 현재)
고려인들은 1990년대 초중반부터 역사적 조국 한국으로 들어와 터를 잡기 시작했다.
2000년 무렵에는 한국으로 들어온 고려인 중 일부가 광주광역시 광산구 월곡동과 산정동 일대에 들어와 자리를 잡았다.
처음에는 단 몇 가구로 광주살이를 시작한 이들은 점차 수가 늘어나 2017년에 4천여 명(등록자 수는 2,869명), 2019년에는 7천 명을 훌쩍 넘어섰다.
이들은 2005년 신 조야씨가 주도하여 개소한 상담소(2009년 고려인지원센터로 확대 개편)를 중심으로 공동체를 형성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광주고려인마을에서는 광주로 이주한 고려인들이 안정적으로 정착할 수 있도록 여러 일꾼들이 드러나지 않는 곳에서 헌신하고 있다.
누구는 재정적 후원으로, 또 누구는 법률, 의료, 사회봉사, 문화예술, 미디어 등 다양한 분야에서 재능을 기부하여 물밑에서 끊임없이 노를 저어줌으로써 고려인마을 공동체가 안정적으로 항해하도록 돕고 있다.
광주광역시는 2013년에 대한민국 최초로 ‘고려인지원조례’를 만들어 제도적 지원도 시작했다.
광주고려인마을은 현재 광산구청과 고려인동행위원회 산하 여러 분과위원회, 그리고 기타 유관단체 및 기관들과 긴밀히 협력하면서 희망의 등대를 향해 힘차게 물살을 가르고 있다.
고려인 디아스포라 역사를 뒤돌아보면서
쌀이냐 책이냐?
[소유의 삶이냐 존재의 삶이냐?]
원동에 살던 고려인들이 1937년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 될 때, 다수는 불확실한 미래를 보장해줄 최후의 수단은 오직 〈쌀〉이라 여기고 당장 물리적 생존에 필요한 식량과 씨앗과 재산을 가지고 열차에 올랐다.
소수의 다른 고려인들은 어두운 밤하늘에 길잡이별이 되어줄 것은 〈책〉이라 확신하고 주위의 비난과 비웃음을 들으면서도 고집스럽게 책과 활자와 서류를 들고 열차를 탔다.
그로부터 많은 세월이 흘렀다. 〈쌀〉을 가지고 들어온 이들은 억척스럽게 황무지를 개척하여 씨를 뿌리고 김을 매고 가을에 풍성히 거둠으로써 고려인사회를 빠르게 안정시켜나갔다.
그뿐만 아니라 그들은 〈책〉을 사랑하는 괴짜 동료들이 물질적으로 고통받지 않고 뜻하는 일에 종사할 수 있도록 무수히 많은 도움을 베풀어주었다.
〈책〉을 가지고 들어온 이들은 이주 초기에 극심한 어려움을 겪었지만 낯선 땅에서 한글문학과 모국어 문화예술을 소중히 지켜나갔다.
그들은 학교와 신문사와 극장에서 모국어를 가르치고 작품을 쓰고 연극을 공연함으로써 〈쌀〉을 가지고 들어온 이들의 지친 심신을 위로하고 그들을 바람직한 민족문화 공동체로 인도하였다.
이 두 부류의 고려인들은 서로에게 부족한 부분을 채워주면서 오늘의 고려인사회를 만들어왔다. 〈쌀과 책〉 즉 ‘소유양식과 존재양식’은 디아스포라 고려인사회를 이끌어온 거대한 수레의 양대 축이었다.
그러므로 고려인 강제이주사, 나아가 고려인 전체 이주사를 놓고 누군가가 〈쌀이냐 책이냐?〉라고 묻는다면 그에 대한 올바른 대답은 아마도 〈쌀도 책도 둘 다!〉가 되어야 할 것이다.
최 아리따(1942-2014) 선생은 카자흐스탄 고려인 역사연구가로 고려인이 생산한 역사자료의 중요성에 일찍이 눈을 뜨고 1990년대 초부터 다수의 유물을 수집하였다. 2014년에 선생이 작고하자 유족들은 평소 고인과 긴밀히 교류해온 김병학 관장에게 고인이 모은 유물의 인수를 정중히 제안하였고 이에 그 유물들이 김병학 관장 컬렉션의 일부로 들어오게 되었다. 최 아리따 선생이 수집했던 유물들이 우리 전시관을 가치 있고 풍요롭게 만들어주고 있음에 감사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