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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려방송] 광주고려인마을 인문학강좌, ‘고려인 구전가요의 이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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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자 월곡고려인문화관
    댓글 댓글 0건   조회Hit 1,172회   작성일Date 22-11-15 1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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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려방송] 광주고려인마을 인문학강좌, ‘고려인 구전가요의 이해’


    [고려방송] 광주고려인마을 인문학강좌, ‘고려인 구전가요의 이해’
    - 디아스포라의 실존적 상황과 그리움의 노래들
    광주고려인마을이 매주 진행한 고려인관련 인문학 강좌가 지역사회의 관심가운데 제8강 ‘고려인 구전가요의 이해‘ 를 끝으로 마무리됐다.

    지난 9월부터 월곡고려인문화관 김병학 관장과 김순흥 전 광주대교수, 박용수 광주시 민주인권평화국장이 강사로 나서 개최한 인문학 강좌는 교육부와 한국연구재단의 후원을 받아 호남대 인문도시사업단, 광주 광산구와 공동으로 진행됐다.

    고려인관련 강좌로 제1강 고려인은 누구인가, 제2강 고려인의 밥상, 제3강 고려인을 통해 보는 한민족 문화의 정체성, 제4강 모국어신문과 고려인의 한글문화. 제5강 우크라이나 전쟁과 고려인, 제6강 고려극장과 공연예술, 제7강 중세한국어의 화석 ‘고려말’, 제8강 ‘고려인의 구전가요의 이해’ 등이다.

     광주고려인마을 인문학강좌, ‘고려인 구전가요의 이해’가 지난 10일 고려인커뮤니티센터에서 개최됐다.(사진=고려인마을 제공)

    지난 10일 고려인커뮤니티센터에서 진행된 김병학 관장의 ‘고려인의 구전가요의 이해’ 는 기구하고 파란만장한 삶을 살아온 옛 소련 고려인들이 애창했던 수많은 노래를 소개했다.

    김병학 관장 강의 요약은 다음과 같다

    고려인들은 기쁠 때나 슬플 때나 세상이 야속할 때나 부모 형제가 그리울 때나 그 언제든 그 어디서든 노래를 불러왔다.

    고려인 160년 역사에는 구한말과 일제시대에 우리의 조상들이 두만강을 건너가면서 한반도에서 직접 수입해간 노래들을 비롯하여 연해주에서 창작한 노래, 강제이주 이후 후손들이 중앙아시아에서 새로 지어낸 노래, 북한에서 들여온 노래, 최근 한국에서 가져간 노래 등으로 빼곡히 채워져 있다.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는 고려인 가요들은 고향과 부모 형제를 그리는 노래가 상당 부분을 차지한다. 구한말과 일제시대에 살길을 찾거나 일제에 항거하고자 부득불 고향과 부모 형제를 등지고 두만강을 건넌 이주 1세대들의 애끓는 사연이 담긴 노래는 간난신고의 삶을 살아온 자손들에게도 온전히 공감되어 전해졌다. 비록 후대 세대에게는 세월이 흘러 생활의 여건이 많이 달라졌지만, 조국을 떠나온 디아스포라라는 실존적 상황은 그들에게도 변함없이 그대로 남아있기 때문이다.

    2000년 첫 10년대 초반까지 고려인들이 불러온 대부분 노래는 악보 없이 구전으로만 전승되어왔다. 이는 실제로 악보 없이 구전된 가요가 많다는 것과 설령 악보가 있는 가요라 할지라도 대다수 고려인이 악보에 의존하지 않고 전통적인 구두 전달과 가사필사본 전달의 방법으로 익히고 재생해왔다는 뜻이다.

    고려인들은 연해주와 중앙아시아에서 70여 년을 살아오면서 비록 많은 가요를 창작했지만 정치적‧사회적‧인구학적 제약에 막혀 많은 시련을 겪었다. 그런 이유로 주로 구전을 통해 전승된 고려인 가요의 가사와 음조가 사회적 제약과 시간의 흐름 속에서 변화를 겪어 원래의 노래와 얼마간 달라진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1. 가요의 출처와 갈래

    출처에 따라 고려인 구전 가요들을 크게 나누어보면 일제시대까지 한반도에서 창작되어 구전된 노래, 옛소련에서 창작된 노래, 북한에서 들어간 노래, 외국의 곡에 우리 가사를 붙인 노래, 소비에트 시대 러시아 노래를 우리말로 번역한 노래 등으로 구분된다.

    이 중 전자의 세 부류가 압도적 다수를 차지한다. 한편 개방 이후 한국에서 들어간 노래 중에서도 고려인에게 구전가요처럼 수용된 것들이 더러 발견된다.

    1) 한반도에서 들어간 노래

    한반도에서 창작되어 옛소련으로 흘러 들어간 노래들은 주로 우리나라 고유의 민요나 잡가나 판소리, 그리고 구한말이나 일제시대에 불린 계몽기의 창가나 유행가들이다. 그중 고려인들에게 가장 광범위한 영향을 미친 노래는 단연 「춘향가」로서 타령이나 잡가, 그리고 좀 더 현대적인 노래에까지 그 흔적을 남기고 있다. 고려극장에서 연극 「춘향전」 공연하면서 당시 정서에 맞게 「춘향가」를 개사, 편곡하여 오랫동안 대중에게 보급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1933년에 이면상이 작곡한 「울산 아가씨」도 지금까지 고려인들에게 널리 애창되고 있다.

    그러나 초기에는 서도민요인 「수심가」 계통의 노래가 많은 변종을 낳으며 고려인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서도민요인 노래 「장한몽(또는 이수일가)」은 「김화룡가」나 「김영찬가」 같은 무수한 변종을 낳으며 고려인들에게 들불처럼 번져나갔다. 「장한몽」은 원래 《고려극장》에서 상연한 연극 「장한몽」(1935년)에서 무대음악으로 만들어진 노래였는데 연극과 함께 대중의 마음을 사로잡아 큰 인기를 끌며 오래도록 불렸던 것이다.

    한반도에서 창작된 노래들이 유입된 경로는 강제 이주 이전에는 한반도에서 연해주로 들어간 사람들에 의해서 직수입되었고 강제 이주 이후에는 북한과의 교류를 통해 유입되었다. 그런데 나중에 북한을 통해 유입된 노래들에는 수심가나 판소리, 해방 이전의 동요들은 찾아볼 수 없고 「아리랑」이나 「베틀가」 같은 일부 민요와 신민요에 한정되었다.

    2) 옛소련에서 창작된 가요

    소련에서 창작된 가요들은 사회주의 조국에 대한 찬양이나 여성해방, 농촌의 기계화나 근대화 또는 소득증대를 고무하는 노래들이 압도적으로 많다. 그러면서도 매우 서정적이고 부드러운 노래들도 많은 것이 특징이다. 심지어는 동요마저도 계몽적이거나 사회주의의 이상을 노래하는 것들이 적지 않은데 「아이들아 놀자」 등이 그런 유의 동요다. 소비에트 사회주의 이념이 사회 전반을 탄탄히 지배하던 1980년대까지 이런 유의 노래들은 꾸준히 만들어졌다.

    강제 이주(1937년) 이전 연해주 시기의 작곡가 현황을 살펴보면 그 속에서 돋보이는 존재가 한 명 있었으니 그가 바로 작곡가 태인수다. 그는 소왕령(우수리스크) 고려사범전문학교에서 음악교원으로 일하면서 1932년에 고려인 최초로 『혁명창가집』(원동국립출판사)을 발간했다. 이후 점차 무명의 작곡가들에 의해 자생적으로 생겨난 노래들과 자발적으로 음악계에 발을 들여놓은 아마추어 작곡가들이 창작한 노래들이 조금씩 나타났다.

    고려인 1세대에 해당하는 작곡가로는 연성용, 리 게르만, 오철암, 정인묵 등이 있으며 그들이 작곡한 「김만삼에 대한 노래」, 「잘 있거라」, 「결혼잔치 노래」 등은 지금도 고려인 노년층에서 널리 불리고 있는 대표적인 노래들이다. 특히 1933년에 연성용이 작사‧작곡한 「씨를 활활 뿌려라」는 시대를 초월하여 고려인 모두에게 두루 애창되고 있어 가히 고려인의 「아리랑」이라 부를 만하다.

    강제 이주 이후에는, 고려인 1세대에 해당하지만 전문작곡가의 길을 걸었던 박영진(1909~1978)이 등장한 뒤로부터 고려인노래의 양적, 질적 팽창이 이루어졌다. 박영진이 지은 노래로는 「처녀의 약속」, 「목화 따는 처녀」 등이 유명하며 그의 영향을 받은 김 윅또르의 「기쁜 날」, 윤 뾰뜨르의 「목동의 가을」 등도 널리 불리고 있다.

    3). 북한에서 들어간 노래

    북한에서 들어간 노래들은 고려인들에게 오래도록 사랑받으며 그들의 문화예술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양적 규모로도 다른 노래들을 압도한다. 시대별로도 해방 초기의 노래부터 시작하여 옛소련 해체 시기에 나온 노래까지 비교적 고른 분포를 보인다.

    이는 옛소련과 북한이 같은 사회주의 국가로서 오랫동안 상호 문화교류를 지속해왔기 때문이다. 또 소련에서는 북한 정부 출범 초기에 국가를 소련식 사회주의 체제로 개편하고 위정자들의 통치를 돕기 위해 다수의 고려인 지식인을 북한에 파견했는데 그들 중 문화예술 관련분야 종사자들이 북한 노래를 옛소련 고려인 사회에 널리 소개했기 때문이다. 북한 정부 또한 해방 초기부터 1980년대까지 소련에 여러 차례 친선사절단을 보내 조선의 가무를 널리 선보였다. 한편 일부 북한 출신 무용수와 가수들은 다양한 이유로 중앙아시아로 흘러 들어가 고려극장에서 활약했는데 그들 또한 북한가요를 인기리에 보급했다.

    북한에서 들어간 노래들은 크게 사회주의의 이상과 수령을 찬양하는 노래와 민요풍의 서정적인 노래로 나눌 수 있다. 민요풍의 서정적인 노래들은 그대로 남아 고려인들에게 널리 사랑받았다. 「울산 타령」, 「소방울 소리」 등이 그 대표적인 노래로 지금도 고려인들 잔치나 축제에서 단골 메뉴로 불리고 있다.

    4). 외국의 곡에 우리 가사를 붙인 노래와 구소련 노래를 우리말로 번역한 노래

    외국의 곡에 우리 가사를 붙인 노래는 별로 많지 않다. 그중에서 최남선이 지은 「망향가」가 가장 대표적인 노래다. 구한말 일본에서 만들어진 창가의 곡에 최남선이 가사를 썼다고 전해지는 이 노래는 고향 산천과 부모 형제를 이별하고 먼 타향에서 유랑하는 고려인 디아스포라의 정서를 구구절절이 드러내는 내용으로 시대를 초월하여 고려인들에게 두루 사랑받고 있다.

    옛소련에서 창작된 러시아나 소비에트 가요가 우리말로 번역된 노래는 외국의 곡에 우리 가사를 붙인 노래보다 훨씬 많다. 러시아어권에서 널리 애창되는 소비에트 시대 노래들 상당수는 고려인 모국어 신문 《레닌기치》에 우리말로 번역되어 소개되었다. 그런데 이 가요들은 신문에만 번역되어 실렸을 뿐 고려인들 사이에서 거의 우리말로 애창되지 않았다.

    우리말로 번역되어 널리 불린 노래를 굳이 하나 고르자면 독소전쟁(1941~1945) 시기에 나온 소비에트 노래 「까츄샤」 정도인데 이 노래는 독소전쟁이 진행 중이던 1940년대 초반에 극작가 연성용에 의해 우리말로 번역되어 노년층에서 간간이 우리말로 불려왔다.

    2. 고려인 가요 창작의 산실과 전달매체 - 《고려극장》과 《고려일보》

    현재 전해지고 있는 고려인 가요는 대부분 《고려극장》과 《고려일보》 신문사라는 양대 민족문화기관의 품 안에서 작사, 작곡되었고 이 두 기관을 통해서 고려인 사이에 널리 보급되었다.

    《고려극장》에는 거의 모든 고려인 작곡가와 가수들이 총 망라되어 활동하고 있었고 《고려일보》 신문사에는 거의 모든 가사 작사자들이 모여든 데다 그들이 그렇게 창작한 가요들이 신문 지면을 통해 대중에게 널리 보급되었기 때문이다. 이 두 기관의 역할을 빼놓고는 고려인 가요에 대해서 말할 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 《고려극장》과 무대음악

    《고려극장》은 고려인 작곡가들이 우리 가요를 창작할 수 있고 그렇게 창작한 가요를 대중들에게 직접 전달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통로였기 때문에 대부분의 고려인 작곡가들이 이 극장에 소속되어 일했다. 그들은 극장에서 일하면서 고려인 창작가요의 대부분을 작곡했다.

    고려인음악은 연극 「춘향전」을 계기로 《고려극장》을 통해 획기적으로 발전하고 전파되었다. 고려극장은 1935년 9월 6일 연극 「춘향전」을 무대에 올렸는데 연극이 대단히 성공적이어서 호평이 쏟아지는 가운데 극장지도부와 고려인사회계에 자연스럽게 무대음악의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그리하여 그 이후부터는 거의 모든 연극에 극장 소속 음악가들이 전문적으로 무대음악을 만들어 연극에 버무려 넣었다. 그렇게 만들어져 연극 도중에 무대에서 불린 연극 음악은 고려인 관객들에게 대단히 큰 인기를 끌어 널리 애창되었다.

    1968년에는 탁월한 음악가 정인묵에 의해 극장 내에 《아리랑가무단》이란 전문 악단이 만들어졌다. 거기에 음악을 공부한 전도유망한 고려인 2세대 음악가들이 속속 합류하였다. 이들은 1세대 선배 음악인의 뒤를 이어 새로운 음악으로 새 시대를 열었다. 그때부터 《아리랑가무단》은 카자흐스탄 영내에서 새로운 음악을 선도하는 뛰어난 악단으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2) 가요작사자들의 요람- 《고려일보》

    고려인 한글 신문은 고려인들이 문학적 창작 능력을 모국어로 표현할 수 있는 유일한 지면을 제공해주었다. 고려인 최초의 진정한 모국어 신문이라 할 수 있는 《선봉》 신문(1923~1937)은 뜻있는 작가들의 문학작품과 노래 가사들을 꾸준히 지면에 실어 오다가 1933년 10월 3일에 역사적인 「문예페-지」란을 만들어 독자들에게 더욱 다채로운 작품과 작가들을 발굴, 소개하였다. 이 신문은 강제 이주 직전에 폐간되었다가 반년 만에 《레닌기치》(고려일보의 전신)라는 제호로 복간되었는데 「문예페-지」란을 그대로 계승하여 중앙아시아에서 새롭게 창작된 문학작품과 노래 가사들을 계속하여 독자들에게 소개하였다.

    《레닌기치》에는 거의 모든 고려인 모국어 작가들이 기자로 일했다. 당시 고려인 작가들이 모국어로 말하고 작품을 발표하고 일할 수 있는 곳은 모국어 신문사인 《레닌기치》사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고려일보》는 좋은 노래 가사들을 입수하면 그것을 악보와 함께 실어 고려인 대중에게 널리 알렸으며 때때로 “고려인노래의 발전과 개혁”을 위한 논쟁의 장을 마련해 뜻있는 사람들을 토론의 장으로 끌어들이기도 했다. 《고려일보》가 지면에 소개한 노래 가사는 수백 편이 넘는다. 악보까지 그려서 소개한 노래만 해도 200편 가까이 된다.

    3. 가요 정리를 위한 노력: 필사본과 가요집

    1) 필사본

    고려인들은 모국어 구전가요나 창작가요를 모아놓은 가요집을 창가집이라고 부른다. 고려인들도 구전가요 필사본을 왕성하게 작성하였고 지금 그것들이 드물지 않게 발견되고 있다. 그중 국가지정기록물로 등재된 2권의 고려인 구전가요필사본 「리 알렉산드르 창가집」과 「전명진 창가집」에 대해서 짧게 언급하기로 한다.

    「리 알렉산드르 창가집」은 리 알렉산드르라는 인물이 우즈베키스탄 타쉬켄트 조선극장(1939~1950) 배우 전명진(1924~1996년경)의 부탁을 받고 1944년 9월부터 1945년 4월까지 171곡의 고려인 구전가요를 적어준 가요필사본이다. 지금까지 발견된 고려인 창가집 중에서 내용이 가장 풍부하고 또 가장 오래된 것 중 하나다.

    「전명진 창가집」은 《타슈켄트 조선극장》(1939~1950) 배우 전명진(1924~1996년경)이 1945년에 필사한 고려인창가집으로 총 49곡의 가요가 악보와 함께 수록되어 있다. 그리고 상당수 가요의 말미에 그 가요를 필사한 연월일과 시간까지 기록되어 있다. 지금까지 전해오는 고려인창가집 중 악보까지 필사되어 있는 창가집은 이 창가집이 유일하다. 또 이 창가집은 지금까지 발견된 고려인 창가집들 중 가장 오래된 창가집 중 하나이기도 하다.

    2) 가요집

    1932년에 고려인 최초로 태인수의 『혁명창가집』(원동국립출판사)이 출판되었다. 이 가요집에 수록된 노래들은 순전히 소련 사회주의 혁명이념을 찬양하는 것들이다. 혁명의 노래, 군인들의 노래, 건설의 노래, 삐요네르 노래, 여러 가지 노래 등 4장으로 나뉘어 총 59곡의 노래가 실렸다.

    이후 한 세대가 흘러 소비에트 고려인 음악의 창시자로 불리는 박영진의 가요집 『조선의 노래』가 출판되었다. 총 10곡의 노래가 악보와 함께 실렸는데 정작 그가 원했을 서정적인 노래보다는 전쟁이나 체제 옹호의 노래들이 더 많은 지면을 차지하고 있다.

    1970년에는 작곡가 정추(1923~2013)의 가요집 『젊은이의 노래』가 출판되었다. 역시 10곡의 창작가요가 실렸는데 이때는 이미 시대가 달라져 있어서 1곡만 제외하고는 모두 정추가 작곡한 서정적인 노래들로 구성되었다. 한편 정추는 1958년에 고려인 집거지인 카자흐스탄 알마티시 근교 박박티 등을 찾아가서 고려인들이 우리말로 부르는 가요들을 녹취했다. 이것들이 2005년 한국에서 『정추 교수 채록 소비에트 시대 소려인의 노래』(김보희‧정민 정리. 한양대학교출판부)라는 3권의 책으로 출판되었다.

    2007년에는 중앙아시아 재즈음악의 개척자이자 고려극장 주임지휘자로 일했던 한 야꼬브 작곡가와 김병학이 정리한 『재소고려인의 노래를 찾아서 1•2』가 한국에서 출판되었다. 이 가요집은 최초로 고려인 가요사를 정리하고 가요의 출처를 밝혔으며 가요작사자와 작곡가의 생애를 기록하고 고려인들의 모국어인 고려말 발음을 정리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사라진 노래와 살아남은 노래들

    고려인들이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갖은 역사적 소용돌이 속에서 수많은 부침을 거듭해왔듯이 그들이 불러온 노래들도 무수한 정치적‧사회적‧문화적 난관에 부딪쳐 수시로 뒤틀리거나 망가지곤 했다. 그 결과 곡조와 가사가 심하게 왜곡되거나 내용의 상당 부분이 망실되어버린 노래들이 적지 않을뿐더러 전승에서 아주 사라져버린 노래도 헤아릴 수 없이 많다. 어찌 보면 고려인 가요사는 상실과 망실의 역사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 다행스러운 것은 사라져도 크게 아쉬울 것 없는 노래들이 사라진 경우가 다수고 진정으로 가치 있는 노래들은 모진 시련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살아남았다는 사실이다. 특정한 시대에 특정한 이념적 상황과 맞물려 보급되면서 마치 세세무궁토록 불릴 것만 같이 기고만장했던 어떤 노래들은 문헌에나 그 흔적을 남기고 있을 뿐 지금 아무에게도 기억되고 있지 않으며 반대로 퇴폐적이라며 사회적으로 공공연히 지탄을 받아 마음대로 불리지도 못하고 사적인 자리에서나 몰래몰래 불리던 상당수의 노래는 지금까지 온전히 전해지고 있다.

    오직 진실한 노래만이 살아남았다. 진실한 노래만이 살아남아 사연 많은 고려인의 내면세계를 온전히 표현하고 달래주었다.

    고려방송: 엄엘리사(고려인마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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