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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려방송] 광주고려인마을, 고려인 모국어신문 100년 역사의 영웅들 소개

    페이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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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자 월곡고려인문화관
    댓글 댓글 0건   조회Hit 699회   작성일Date 23-11-14 09:42

    본문

    [고려방송] 광주고려인마을, 고려인 모국어신문 100년 역사의 영웅들 소개
    -수많은 시련 가운데 영웅들의 피나는 노력으로 오늘에 이르러
    -강제이주 앞서 신문사 부장급 이상 간부 모조리 숙청된 가운데 살아남은 농업부장 황동훈과 염사일 의 각고의 노력 끝에 복간되는 기적 이뤄
    광주고려인마을 내 고려인문화관(관장 김병학)은 고려일보 창간 100주년 기획전과 더불어 고려인 모국어 신문 100년의 역사와 영웅들에 관한 이야기를 후손들에게 전했다.

    13일 고려인문화관에 따르면, 고려인들의 모국어신문 <고려일보>는 지금부터 100년 전인 1923년 3월 1일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삼월일일>이라는 이름으로 창간되었다.

    이 신문은 제4호부터 <선봉>으로 제호가 바뀌어 발행되다가 고려인 강제이주를 앞둔 1937년 9월 12일 1644호를 내고 폐간되었다. 그리고 1938년 5월 15일 중앙아시아 카자흐스탄에서 <레닌기치>라는 이름으로 복간되어 고려인들의 입과 귀의 역할을 다해오다가 1991년 1월 1일 <고려일보>로 이름이 변경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지금의 고려일보가 한반도와 멀리 떨어진 연해주와 중앙아시아에서 한 세기를 너끈히 견뎌올 수 있었던 것은 여러 선각자들의 수고와 헌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이 신문이 강제이주 직전에 폐간되었다가 이듬해 복간되는 데에는 상상할 수조차 없는 시련이 수반되었다.

    그 시기는 고려일보 100년 역사에서 자칫 모국어 신문의 명맥이 아주 끊길 뻔했던 순간이었다. 물론 두말할 것 없이 그때에도 영웅적으로 자기를 희생하고 헌신한 선각자들이 있었고 그래서 모국어 신문은 결국 되살아날 수 있었다.

    * 사진1 : 강제이주 때 폐간된 신문을 복간하려고 노력하다 목숨을 잃은 《선봉》신문 농업부장 황동훈. 그 옆은 그의 아내 김정희다. (1930년대 중반)/사진=고려인마을 제공

    * 사진2 : 강제이주로 인해 폐간된 신문을 복간하는 데 크게 공헌한 염사일. 그는 나중에 《레닌기치》 부주필을 역임했다. (1940-50년대)/사진=고려인마을 제공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강제이주 직전에 <선봉>신문은 탄압을 받아 부장급 이상 간부들이 모조리 체포되어 숙청되었다. 그런데 농업부장이었던 황동훈만은 용케도 탄압을 피해 강제이주열차를 타고 카자흐스탄 서부 도시 크즐오르다로 들어가게 되었다.

    숙청된 동료들에게 무한한 부채 의식을 느끼고 있었던 그는 폐간된 신문을 복간해보려고 여러 관계기관을 찾아다녔다. 그리고는 날씨가 온화하여 농사 짓기가 좋은 우즈베키스탄의 수도 타슈켄트가 신문사가 들어설 적임지라 판단하고 우즈베키스탄 공산당중앙위원회에 찾아가서 신문발간을 허락해달라고 요청했다.

    그런데 돌아온 답변은 모스크바의 지시가 없어서 안 된다는 것이었다. 그는 이에 굴하지 않고 다시 위험을 무릅쓰고 카자흐스탄의 수도 알마티로 찾아가서 결국 신문발행 허가를 받아냈다. 그리고는 얼마 후에 내무인민위원회에 전격 체포되어 어디론가 사라지고 말았다.

    모두가 두려움에 떨었고, 신문복간은 물 건너간 듯이 보였다. 바로 그때 임시신문사 당세포위원장을 맡고 있던 염사일이 나섰다. 그는 먼저 고려인에게 일정한 주거지를 벗어날 수 없도록 강제된 ‘거주지 제한 규정’을 피해갈 방법을 궁리한 뒤 카자흐인 원주민 복장으로 변복하고 수도 알마티행 열차를 탔다.

    다행히 안전위원과 차장들은 그가 누구인지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그런데 무사히 수도에 도착하고 났더니 다른 문제가 도사리고 있었다. 날이 저물어 여관에 들어가고자 하니 숙박계를 써야 했고 그러면 신분이 탄로 날 것이 분명했던 것이다.

    다행히 당시 소련의 큰 도시들에는 신분 검사를 잘 하지 않는 ‘노동자의 집’이라는 허름한 숙소가 있었다. 염사일은 바로 그곳으로 들어갔고 다음 날 공산당중앙위원회에 찾아가 요령 있게 신문발간 허가를 받아냈다.

    그리고는 크즐오르다로 돌아가 관계기관에 허가증을 내밀고 모국어신문 복간을 허락받았다. 그렇게 하여 <고려일보>는 폐간된 지 9개월 만에 척박한 중앙아시아에서 다시 태어날 수 있었다.

    첫 번째 이야기는 분명한 역사적 사실이고 두 번째 이야기는 고려인 언론인들 사이에서 실화라고 전해오는 이야기다. 당시 언론인 선배들이 모국어 신문을 복간하려고 얼마나 많은 희생을 치르며 애를 썼는지를 극적으로 보여주는 일화다.

    지금의 고려일보는 이처럼 선배 언론인들의 헌신과 희생 위에서 성장하였다. 고려일보는 비록 모국어 구독자와 기자가 절대적으로 부족하여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지만, 후배 언론인들이 선각자들의 이러한 희생을 잊지 않는다면 이 신문은 앞으로도 계속하여 고려인들의 자긍심으로 남을 것이다.

    고려방송: 김병학(고려인문화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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