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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려방송] 광주고려인마을, ‘항일무장투쟁의 별’ 김경천 장군 연보 국내 최초 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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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자 월곡고려인문화관
    댓글 댓글 0건   조회Hit 689회   작성일Date 23-08-29 09:46

    본문

    [고려방송] 광주고려인마을, ‘항일무장투쟁의 별’ 김경천 장군 연보 국내 최초 정리
    -김병학 고려인문화관장의 수년간 노력의 결과물
    -김경천 장군의 생애와 조국애, 독립전쟁역사 한눈으로 볼수 있어
    광주고려인마을은 국내외 최초로 ‘항일무장투쟁의 별’ 김경천 장군의 연보를 정리해 발간했다고 27일 밝혔다.

    고려인마을에 따르면, 이번 정리된 김경천 장군의 연보는 김병학 고려인문화관장의 수년간 노력으로 이루어졌다.

    현재 고려인문화관은 일제강점기 독립전쟁에 헌신한 고려인선조들의 역사와 문화, 생활사, 한글문학, 고려일보 신문자료, 고려극장 사진첩 등 1만2천점의 유물을 소장하고 있다.

    이에 고려인마을은 지난 2020년 10월 관광객 천만시대를 꿈꾸며 ‘역사마을1번지’ 선포식을 갖고 관광객을 맞이하자 매년 고려인마을을 찾는 관광객이 크게 늘어나고 있다.

    김병학 관장은 “고려인 선조들의 잊혀진 역사를 복원하기 위한 작업 중 하나로 김경천 장군의 연보를 정리해 발간했다” 며 "국내 귀환 독립투사 후손 고려인동포들의 자긍심 고취를 위한 작업을 계속 이어나가겠다" 고 밝혔다.

    아울러 고려인마을은 오는 30일 오후 2시 일제 강점기 러시아 시베리아에서 항일 무장투쟁을 벌여 수많은 전과를 올렸던 김경천 장군의 항일애국정신을 계승하기 위한 ’특별전 및 기념세미나’ 를 개최할 예정이다.

    이번에 국내 최초로 정리된 김경천 장군의 연보는 다음과 같다.

    김경천(金擎天) 연보
    1888년 6월 5일 : 함경남도 북청군 서문 밖에서 부친 김정우와 모친 윤옥련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1895년 가을 (8세) : 부친 김정우가 조상 대대로 살던 고향을 떠나 가솔을 데리고 서울로 이주했다. 그는 경기도 광주시 초월면 학현리에 농장을 매입하여 거주지를 정하고 맏아들 성은(成殷)을 데리고 일본으로 유학을 떠났다.
    1899년 가을 (11세) : 모친 윤옥련(尹玉聯)이 사망했다. 경천은 어린 나이에 어머니를 낫게 할 약을 구하고자 어른도 건너기 힘든 강을 건넜고 이에 동네 어른들이 북청에서 온 아이가 강하다고 칭찬하였다.
    1900년 여름 (12세) : 부친 김정우가 일본 유학을 마치고 돌아와 대한제국 육군군기창장으로 재임했다. 아버지와 함께 유학하고 돌아온 형 성은은 대한제국의 유일한 공병장교가 되어 공병대를 설립하고 육군공병부령으로 재임했다.
    1903년 (15세) : 경성학당을 졸업했다.
    1904년 (16세) : 일본에 유학하여 동경육군중앙유년학교에 입학했다.
    1907년 (19세) : 형 성은이 27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1908년 2월 6일 (20세) : 부친 김정우가 53세의 나이로 서울에서 사망했다.
    1908년 6월 8일 (20세) : 여동생 옥진(玉振)이 유복녀로 태어났다. 옥진은 1930년에 경성고등여자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서울에서 남광준(南迋駿)에게 출가했다.
    1910년 6월 (22세) :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동경 목흑기병 제일연대부에서 재직했다. 이 시기에 오랜만에 환국하여 유정화(柳貞和)와 혼인을 치렀다.
    1913년 1월 (25세) : 가족을 데리고 일본 동경으로 이주하였다.
    1915년 (27세) : 6월에 장녀 지리(智理)가 태어났다. 9월에 기병 소위에서 기병 중위로 승진했다.
    1917년 2월 (29세) : 차녀 지혜(智慧)가 태어났다.
    1919년 (31세) : 유럽에서 일어난 제1차 세계대전의 영향으로 국내와 해외에서 혁명의 분위기가 점차 증가되는 것을 보고 동경연대에서 휴가를 얻어 1919년 1월 서울 사저로 돌아와 삼일운동에 참가하게 되었다. 4월에 삼녀 지란(智蘭)이 태어났다.
    1919년 6월 6일 (31세) : 3.1독립만세운동을 목격한 뒤 해외에서 무장투쟁을 준비하기 위해 후배 지청천과 함께 비밀리에 서울을 떠나 압록강을 건너 남만주로 망명했다.
    1919년 6~9월 (31세) : 간도의 신흥무관학교에서 일본육군사관학교 후배 지청천, 대한제국 경성무관학교 2회 출신 신팔균(신동천)과 함께 독립군을 양성했다. 사람들은 김경천, 지청천, 신동천 이 세 사람을 ‘남만삼천’이라고 일컬었다.
    1919년 9월 (31세) : 무장투쟁에 필요한 무기구입 문제로 러시아 연해주로 건너가 무력투쟁을 준비했다.
    1920년 (32세) : 수청지역에 수시로 출몰하여 우리 유민들을 괴롭히는 마적들을 잇따라 소탕했다. 그해 5월 18일에는 부족한 인원과 빈약한 무기로, 일본군의 지원을 받아 잘 무장한 채 한인마을을 약탈하고 방화하던 마적 300여 명을 일거에 소탕하였다. 이를 계기로 김경천의 이름이 국내외에 널리 알려졌다.
    1920년 9~10월 (32세) : 간도에 있는 무관학교 교관으로 초청받아 가던 중 일본군이 간도로 들어가 도처에서 한인과 독립군들을 학살하고 추격해오므로 부득불 연해주로 되돌아갔다.
    1920년 후반(또는 1921년 초) (32(33)세) : 마적토벌 후 수청지역에 군정을 단행하고 군정 책임자가 되었다. 그리하여 고려인은 물론 중국인과 러시아인까지도 김경천의 증명서를 받아야 수비구역 바깥으로 출입할 수 있었다. 러시아식 교육제도를 전폐하고 아동을 모국어로 교육하게 하는 등 여러 제도를 개혁하였다.
    1921년 4월 (33세) : 수청고려의병대 총사령관이 되었다. 한창걸의 고려로농군회와 강국모의 혈성단이 연합하여 수청고려의병대를 만들고 김경천을 초청해 사관 양성과 군무를 맡겼기 때문이다. 연해주에서 사관 양성 교육은 오직 김경천만이 할 수 있었다. 이로써 부대의 전투력이 크게 향상되어 실전에서 혁혁한 전과를 올렸다.
    1921년 10월~1922년 6월 (33~34세) : 러시아 적백내전에 참가하여 일본군의 지원을 받고 쳐들어오는 백군과 무수한 전투를 벌였다.
    1921년 12월 (33세) : 러시아 적군 부대와 연합하여 도병하에서 백군과 전쟁을 치렀으나 적군 부대 대대장이 부대원들과 함께 백군에 항복하여 부득불 전세가 밀리게 되었다. 그때 항복하지 않은 적군 부대원 중 100여 명이 김경천 부대로 들어옴으로써 김경천은 고려인-러시아인 연합부대 총사령관이 되어 전쟁을 지휘했다.
    1922년 1월 (34세) : 인원이 채 50명도 안 되는 부대원으로 야간에 이만시를 습격하여 백군 300여 명을 물리쳤다. 그러나 날이 밝자 백군 수백 명이 총공격해오므로 퇴각하였다.
    1922년 6월 (34세) : 연해주에서 철병하는 일본군과 이를 따라 퇴각하는 백군 사이의 허리를 끊는 작전을 성공적으로 수행했다.
    1922년 여름 (34세) : 연해주 빨치산부대 혁명군사위원회로부터 뽀시예트 및 훈춘 구역 빨치산부대 총사령관으로 임명받았다.
    1922년 가을 (34세) : 수청으로 돌아가 군사학 서적 번역에 착수하였다.
    1923년 (35세) : 상해에서 열린 국민대표회의에 참가하고 돌아왔다.
    1925년 봄 (37세) : 서울에서 아내 유정화가 세 딸을 데리고 연해주로 들어왔다.
    1926년 봄 (38세) : 수청 서개척리로 이주해 2년 가까이 거주했다. 1926년 9월에 장자 수범(秀凡)이 태어났다.
    1927년 12월 (39세) : 영주할 목적으로 수청 해안 난채시로 이사 가서 한적하게 농사를 지으면서 살았다. 내전이 끝난 1922년 말부터 이 시기 사이에 김경천은 ‘나제즈다(희망)’라는 이름의 협동농장을 건설하고 조합원들을 지도했다.
    1929년 1월 (41세) : 사녀 지희(智姬)가 태어났다.
    1932년 3월 (44세) : 하바롭스크시 합동국가보안국으로 들어가 일을 시작함으로써 다시 사회의 중심부로 나아가게 되었다. 그는 그곳의 소수민족부서에서 한국어, 일본어, 중국어 통역으로 일했다. 7월에 차자 기범(奇凡)이 태어났다.
    1934년경 (46세) : 블라디보스토크에 있는 고려사범대학교의 초청을 받아 블라디보스토크로 이사하였다. 그는 거기서 일본어와 군사학을 가르쳤다. 김경천의 가족은 블라디보스토크에서 강제이주 직전까지 살았다.
    1936년 가을 (48세) : 소비에트 당국에 전격 체포되어 같은 해 9월 29일 연해주 국경수비대 군법회의에서 3년 금고형(자유박탈형)을 선고받았다. 김경천 가정에 시작된 비극의 서곡이었다.
    1937년 여름 (49세) : 둘째 딸 지혜가 식중독으로 갑자기 사망했다.
    1937년 늦가을 (49세) : 가족들이 연해주에서 중앙아시아 카자흐스탄 까라간다로 강제이주를 당했다.
    1939년 2월 4일 (51세) : 2년 반을 복역하고 석방되었다. 그는 강제이주를 당한 가족을 찾아 3월에 카자흐스탄 까라간다 집으로 들어갔다. 가족과 재회하고 한 가정의 가장으로서 까라간다 주 뗄만 구역 독일인 농장 코민테른 꼴호즈에서 농장작업부로 일을 시작했다.
    1939년 4월 5일 (51세) : 한 달 만에 다시 체포되어 까라간다 정치범수용소에 갇혔다. 여름 더위가 시작되던 6월 25일에 그는 모스크바 부띄르스꼬이(Бутырской) 감옥으로 이감되었고 그해 12월 17일에 재판을 받았다. 재판부는 그에게 간첩죄를 적용하여 강제노동수용소 수감 8년을 언도했다. 재판이 끝나자 당국은 그를 모스크바 근교에 있는 꼬틀라스(Котласс) 시 감옥분소로 옮겼다가 1940년 1월 17일에 러시아의 북부에 있는 꼬미 자치공화국 내무인민위원회 세브젤도를라그(Севжелдорлаг. 북부철도수용소)로 이송했다. 수용소 명칭이 말해주듯이 거기에 수감된 죄수들은 매일 철도건설공사장에 동원되었다.
    1942년 1월 14일 (54세) : 러시아 북부 꼬미 자치공화국 내무인민위원회 북부철도수용소 부설 병원에서 비타민 결핍으로 인한 심장질환으로 사망했다. 그의 시신은 수용소에서 800m 떨어진 지점에 묻혔다. 그의 사망 일자는 카자흐스탄과 러시아 관계당국에서 내준 증명서마다 달리 기록되어 있다. 지금까지 한국에는 1월 2일로 알려져 있고 카자흐스탄 측에서 2008년에 내준 자료에는 1월 26일로 적혀있으나 김경천이 마지막 숨을 거둔 수용소가 있었던 꼬미 자치공화국에서 내준 증명서에는 1월 14일로 나와 있다. 꼬미 자치공화국 측 증명서가 사실에 가장 근접할 것으로 보인다.
    1971년 6월 13일 : 김경천의 아내 유정화(1892년 5월생)가 79세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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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6년 : 1936년에 김경천이 체포되어 3년 금고형을 선고받은 사건이 재심되어 무죄선고가 내려졌다.
    1959년 2월 16일 : 모스크바 군관구 군사재판소는 김경천이 1939년에 체포되어 그해 12월 17일에 간첩죄로 8년 형을 선고받은 사건을 재심하여 무죄를 선고하고 다음날 17일에 사후복권 시켰다.
    1993년 4월 14일 : 카자흐스탄은 1993년 4월 14일에 선포한 ‘정치적 탄압에 의한 희생자의 명예회복에 관한’ 법률에 의거하여 김경천의 명예를 회복시켰다.
    1998년 8월 15일 : 대한민국 정부는 김경천에게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다.

    고려방송: 안엘레나(고려인마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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